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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산국 제5대 대통령 선거
북산국 제4대 부통령 선거
1963년 5월 15일
4대 대선
3대 부선
→
1967년 5월 13일
5대 대선
4대 부선
→
1971년 4월 12일
6대 대선(간선)
부통령제 폐지
투표율
97.01%
▲ 2.63%p
대통령 선거 결과
후보
득표율
100%
득표수
9,633,376
부통령 선거 결과
후보
득표율
79.19%
17.51%
득표수
8,337,059
1,843,758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1. 개요2. 배경
2.1. 1963년 선거와 자유당의 위기2.2. 1965년 하원 선거와 야당 탄압2.3. 사이토 다카아키2.4. 루이나와의 접촉
3. 부정선거 방식
3.1. 투표 단계3.2. 개표 단계
4. 결과
4.1. 개표 결과4.2. 부정의 폭로
5. 항의 시위
5.1. 5월 시위5.2. 2년간의 산발 시위
6. 영향7. 루이나 개입 의혹
7.1. 드러난 정황7.2. 이권 양도 의혹7.3. 루이나의 입장
8. 평가9.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편집]

1967년 5월 13일 치러진 북산의 제5대 대통령 선거 및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여당인 자유당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부정선거.

민주당 대통령 후보 후지타 히로유키가 선거 한 달 전 사망하면서 현직 대통령 하세가와 쇼이치는 단독 후보가 되었고, 실질적인 승부는 부통령 선거였다. 직전 1963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나카무라 마사아키가 부통령에 당선된 상태였기 때문에, 69세의 고령인 하세가와가 임기 중 사망하면 대통령직이 야당 소속 부통령에게 넘어갈 수 있었다. 자유당은 이를 막기 위해 내무장관 사이토 다카아키의 지휘 아래 공무원과 경찰을 동원해 전국적인 부정을 저질렀다.

이 선거에는 루이나가 자국에 우호적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개입했다는 의혹이 따라다닌다. 선거 직후 야당이 공개한 내무부 문건과 1990년대 루이나 언론의 보도로 일부 정황이 드러났으나, 루이나 정부는 개입 사실을 확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고 있다. 북산 정계와 언론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처럼 회자되어 왔다.

선거 이후 2년 가까이 이어진 항의 시위는 1969년 긴급조치로 봉쇄되었다. 이듬해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부통령제가 함께 폐지되면서, 5.13 부정선거는 북산에서 치러진 마지막 직선 대통령 선거가 되었다. 직선제는 1994년 개헌에서야 복원된다.

2. 배경 [편집]

2.1. 1963년 선거와 자유당의 위기 [편집]

1955년 헌법은 직선 대통령과 함께, 대통령 유고 시 그 직을 승계하는 부통령을 따로 선출하도록 했다. 두 선거가 별개로 치러졌기 때문에 대통령과 부통령이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올 수 있었다.

1963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두 차례 임기를 마친 다나베 쇼조의 후계자로 하세가와 쇼이치(長谷川 正一)를 내세웠다. 하세가와는 옛 왕가인 하세가와 가문의 방계 출신으로, 식민지 시절 청평 총독부 재무국장을 거쳐 공화국 초기 재무장관을 지낸 관료였다. 자유당은 선거를 앞두고 그를 '왕가의 피를 이은 공화국의 지도자'로 내세우는 대대적인 선전을 벌였다. 1948년 정치에서 물러난 왕실의 권위를 여당 후보의 정통성으로 끌어온 것이다. 루이나 국립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제인 다이치[2]는 이 시기 자유당과 친여 단체가 조성한 분위기를 '하세가와 숭배 운동'이라 부른다.

유력 야당 후보였던 민주당의 이이누마 아키노리가 선거 운동 도중 병으로 사망하면서 하세가와의 압승이 예상되었다. 남은 야당 후보인 국가민주진보당의 오카다 타츠오는 야권 전체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개표 결과 하세가와는 504만 표, 오카다는 약 216만 표를 얻었고, 이미 사망한 이이누마를 기리는 추모표도 약 185만 표가 나왔다. 하세가와는 전체 투표의 55.7%를 얻는 데 그쳤고, 투표자의 44.3%가 끝내 그를 찍지 않은 셈이었다. 직전 1959년 선거에서 다나베가 74.6%를 얻었던 자유당에게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나카무라 마사아키가 자유당의 다카하시 요시후미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3자 구도에서 55.7%를 얻은 것은 무난한 승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다이치 교수는 대대적인 선전과 유력 후보의 사망이라는 호재가 겹쳤는데도 투표자의 절반 가까이가 여당 후보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자유당의 체면이 크게 구겨졌다고 평가한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아예 야당 후보가 당선되었고, 자유당 계열 후보들의 득표를 모두 합쳐도 과반에 미치지 못했다. 적어도 유권자의 절반 가까이가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었다.

대선 직후인 1963년 8월 지방선거에서는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강세를 보였다. 신린시 의회 47석 가운데 40석을 민주당이 차지했고, 자유당은 단 1석을 얻는 데 그쳤다. 전국 곳곳에 하세가와의 선전 현수막과 초상화가 걸려 있던 와중에 나온 결과였다.

2.2. 1965년 하원 선거와 야당 탄압 [편집]

자유당은 대선 직후부터 차기 선거를 걱정해야 했다. 1965년 하원 선거에서 자유당은 전체 233석 가운데 127석을 차지해 과반을 지켰으나, 득표율은 42.1%에 그쳤다. 선거 과정에서 이미 여러 부정 시비가 일었음에도 거둔 결과였다. 민주당은 신린, 후잔, 로쿠 등 주요 도시에서 승리하며 개헌 저지선을 넘는 79석을 확보했다.

불리해진 국면에서 자유당 정권은 야당 탄압으로 대응했다. 1966년 1월 1·23 사건이 일어나자, 계엄 아래 설치된 합동수사본부는 반란의 배후를 찾는다며 야권 인사들을 대거 연행했다. 계엄이 해제된 뒤인 1966년 9월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확보했다는 진술을 근거로 오카다 타츠오와 국가민주진보당 간부들을 반국가활동방지법 위반과 청평 내통 혐의로 기소했다. 이를 국가민주진보당 사건이라 부른다. 오카다는 1967년 2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3월에 처형되었는데, 선거를 불과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오카다와 청평의 연계를 입증하는 증거는 끝내 제시되지 않았다.

같은 해 정부는 반국가활동방지법을 개정해 언론 보도와 정당 활동에 대한 처벌 범위를 넓혔다. 1·23 사건 이후 '구국 대통령'이라는 선전이 더해지면서 전국에 하세가와의 동상과 기념관이 세워지기 시작했지만, 여론조사가 금지된 상황에서도 민심의 이탈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1966년 가을에는 하세가와가 가벼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문이 돌았고, 대통령의 건강 문제는 부통령 선거의 무게를 한층 키웠다.

2.3. 사이토 다카아키 [편집]

이 모든 움직임의 중심에는 1966년 3월 내무장관에 임명된 사이토 다카아키가 있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모든 공무원은 하세가와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며, 차기 선거에서 반드시 자유당 후보를 당선시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전국의 군·읍·동에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해 매주 득표 공작을 점검하게 했고, 1966년 말부터는 직접 전국을 순회하며 공무원들에게 자유당 후보 당선을 독려했다.

사이토의 세계관은 단순했다. "정권은 곧 국가이고, 정권이 무너지면 국가도 사라진다."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고, 그는 집권 기간 내내 하세가와의 '실행자'로서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어떠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하세가와 쇼이치 대통령과 다카하시 요시후미 선생이 반드시 당선되도록 하라. 세계 역사상 대통령 선거에 소송이 제기된 적이 있느냐? 법은 나중 일이고, 우선 당선부터 시켜 놓아야 한다. 옥살이를 하더라도 내가 하고, 책임을 지더라도 내가 진다. 이는 국가대업 수행을 위한 지시이니, 군수와 경찰서장들은 시키는 대로만 하라.

— 사이토 다카아키, 군수 및 경찰서장들과의 모임에서 (출처: 1967년 민주당이 공개한 내무부 내부 문건)
4할 사전투표: 선거 당일 자연 기권표와 금전으로 매수한 표를 포함해 전체 유권자의 약 4할 정도를 미리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투표함에 넣어 둔다.

3인조·5인조 공개투표: 미리 짜 둔 3인조, 5인조 단위로 조장의 확인을 거쳐 투표하고, 자유당 선거위원에게 보여 준 다음 투표함에 넣는다.

완장부대 활용: 자유당 완장을 찬 인원들을 투표소 주변에 배치해 심리적 압박을 가하고, 유권자들이 자유당에 투표하도록 유도한다.

야당 참관인 축출: 민주당 측 참관인을 매수하여 참관을 포기시키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억지 구실을 붙여 투표장에서 내쫓는다.

— 당시 내무부가 하달한 구체적인 부정선거 행동 지침

2.4. 루이나와의 접촉 [편집]

사이토는 1963년 선거와 지방선거, 1965년 하원 선거의 결과를 분석한 뒤 국내 통제만으로는 정권의 존속을 담보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경찰 조직을 키우고 공무원 친목회로 충성을 다짐하게 했지만 민심은 이미 떠나 있었고, 1·23 사건 이후에도 대학가의 학생 운동은 오히려 세를 넓히고 있었다. 사이토는 정권을 지탱할 새로운 축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그것이 루이나라고 판단했다.

이후의 경위는 선거 직후인 1967년 6월 민주당이 입수해 공개한 이른바 '사이토 보고서'와 관련자 증언에 근거한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사이토는 1966년 가을 주루이나 북산 대사관을 통해 루이나 당국과 비밀 접촉을 시작했다. 겉으로는 경제 협력과 기술 원조를 요청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제 목적은 선거 관리와 여론 조작, 정보 활동에서 루이나의 도움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보고서는 하세가와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방안을 건의하고 있다.
루이나 금융 네트워크를 통한 비밀 자금 지원 확보.

루이나 자문단이 제공하는 선거 관리·심리전 기법 도입.

루이나 정보기관을 통한 야당·학생 운동 세력 색출 및 약점 수집.

루이나 해군·공군의 북산 연안 훈련을 명목으로 한 위력 시위 전개.

— 이른바 '사이토 보고서'의 건의 사항 (1967년 민주당 공개 사본)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하세가와는 처음에 이를 거부했다. 왕가의 이름을 앞세워 당선된 대통령이 외세의 손을 빌리면 권위가 무너진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사이토는 정권의 붕괴가 곧 국가의 붕괴라는 논리를 되풀이했고, 대통령은 결국 마지못해 이를 승인했다고 한다.

증언과 문건에 따르면 이후 루이나 측 인원 소수가 '행정 자문'이라는 명목으로 입국해 선거 관리 기구와 경찰 지휘부에 자문을 제공했고, 신문·방송사 편집국에는 루이나식 심리전 기법이 도입되었다. 다만 이들이 루이나 정부가 공식적으로 보낸 인원인지, 하쿠센 조약에 따라 이미 주둔하던 군사고문단 소속 인원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3. 부정선거 방식 [편집]

가능한 온갖 수법이 총동원되었다. 다음은 선거 직후 민주당이 입수한 내부 문건과 이후 선거무효 소송, 언론 보도에서 드러난 수법들이다.

3.1. 투표 단계 [편집]

  • 4할 사전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투표함의 40% 정도를 하세가와 쇼이치, 다카하시 요시후미 표로 미리 채워 놓고 시작했다. 선거 전에 미리 표를 넣거나 준비된 투표함으로 바꿔치기하는 등 다양한 방식이 동원되었다.
  • 야당 참관인 축출: 민주당 참관인을 매수하거나 억지 구실을 붙여 투표소에서 쫓아냈다. 투표소 시계를 조작해 "선거가 끝났다"고 속이거나 협박, 납치, 폭행으로 내보냈다.
  • 3인조·5인조·7인조 투표: 유권자를 3~7명씩 한 조로 묶어 조장의 확인 아래 투표하게 했다. 조장은 자유당 당원이나 공무원 친목회 회원이었다.
  • 완장부대 압박: 자유당 완장을 찬 사람들이 투표소 주변에 배치되어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 금품 살포와 협박: 탁주와 고무신, 쌀 봉투 등을 뿌리며 자유당 표를 사거나, 폭력배를 동원해 유권자에게 압력을 넣었다.
  • 빙글빙글 투표함: 투표함을 들고 한참 돌아다니다가 준비된 다른 투표함으로 바꿔치기했다.
  • 유령 유권자: 이미 사망했거나 존재하지 않는 인물의 이름으로 표를 행사했다.
  • 덧기표: 기표소에 연필을 비치해 두었다가, 개표 전에 야당 칸의 기표를 지우고 자유당 칸에 다시 기표했다.
  • 집단 위임 투표: "글을 모르는 주민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마을 대표가 주민 수십 명의 표를 대신 행사했다.
  • 투표소 봉쇄: 야당 강세 지역 투표소 앞에 차량을 늘어세워 유권자가 투표하지 못하게 했다.
  • 노인 위협 투표: "자유당을 찍지 않으면 구호 양곡 배급이 끊긴다"는 소문을 퍼뜨려 노인들을 겁주었다.
  • 이동 투표함: 공장에 투표함을 들고 가 관리자 입회 아래 집단 투표를 강요했다.
  • 위장 전입: 자유당 지지자들의 주소를 야당 강세 선거구로 대량 이전해 유권자 명부를 부풀렸다.
  • 유권자 바꿔치기: 야당 지지 성향의 청년들을 경찰이 선거 당일 연행하고, 그 이름으로 자유당 당원들이 투표했다.
  • 점심시간 매표: 노동자들에게 도시락과 탁주를 나눠 주며 "먹은 사람은 자유당을 찍으라"고 강요했다.
  • 군인 강제 투표: 군인들이 장교의 감시 아래서만 투표하도록 해 자유당 표를 강요했다. 1·23 사건 이후 숙군을 거친 군은 이 지시에 사실상 저항하지 않았다.

3.2. 개표 단계 [편집]

  • 올빼미표: 밤중에 투표소에 잠입해 투표함을 통째로 바꿔치기했다. 대낮에는 일부러 정전을 일으켜 어둠을 틈타 바꿔치기하기도 했다.
  • 피아노표: 매수된 검표원이 야당 표를 책상 밑으로 떨어뜨린 척하며, 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피아노 건반 치듯 도장을 찍어 무효표로 만들었다.
  • 샌드위치 개표: 다른 후보 표 뭉치 위아래에 자유당 표를 씌워 전부 자유당 표로 집계했다. 아예 검표조차 하지 않고 한 뭉치를 몽땅 자유당 표로 계산하기도 했다.
  • 주먹 개표: 개표장에서 야당 표를 발견하면 주먹으로 구겨 버리거나 불태웠다.
  • 뒷골목 개표: 정전을 핑계로 투표함을 끌고 나가 뒷골목에서 따로 개표해 전부 자유당 표로 만들었다.
  • 거꾸로 기입: 집계표를 일부러 뒤바꿔 기입해 야당 표는 줄고 자유당 표는 늘어나게 했다.
  • 창의적 무효 처리: 야당 표에 점 하나를 찍거나 종이를 찢어 무효표로 분류했다.

4. 결과 [편집]

4.1. 개표 결과 [편집]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한 투표율은 97.01%로, 1963년 선거보다 2.63%p 높았다. 단독 후보였던 하세가와는 유효표 9,633,376표를 모두 얻어 당선되었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자유당의 다카하시 요시후미가 8,337,059표(79.19%)를 얻어, 1,843,758표(17.51%)에 그친 현직 부통령 나카무라 마사아키를 크게 앞섰다. 나머지 3.30%는 군소 후보들이 나누어 가졌다.

발표된 수치 자체가 부정의 흔적을 드러냈다. 대통령 선거의 유효표는 부통령 선거보다 약 90만 표 적었는데, 이는 단독 후보에게 표를 주지 않으려 한 유권자들이 기표하지 않거나 일부러 무효표를 낸 결과로 해석된다. 4년 전 부통령 선거에서 이겼던 나카무라의 득표율이 17%대로 떨어진 것도 상식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1963년 나카무라가 60% 넘게 얻었던 신린에서도 그의 득표율은 20%를 겨우 넘었고, 로쿠도의 3개 군에서는 투표자 수가 유권자 수를 넘었다.

4.2. 부정의 폭로 [편집]

민주당은 선거 당일 오후 전국 곳곳에서 부정이 보고되자 "이번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강탈"이라며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동해안의 호라쿠에서는 개표 도중 개표장이 정전되고 투표함 여섯 개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일이 벌어졌고, 이 장면을 목격한 기자의 필름은 경찰에 압수되었다.

5월 20일 민주당은 한 군청 공무원을 통해 입수한 내무부의 부정선거 행동 지침 사본을 공개했고, 6월에는 이른바 '사이토 보고서' 사본을 공개했다. 정부는 두 문건 모두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문건에 적힌 수법과 실제 선거에서 보고된 사례가 일치하면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5. 항의 시위 [편집]

5.1. 5월 시위 [편집]

선거 다음 날인 5월 14일 신린 국립대학교 학생 약 2,000명이 교문을 나서 선거 무효를 외치며 시청 광장까지 행진했다. 시위는 곧 후잔과 로쿠, 호라쿠의 대학과 고등학교로 번졌다. 5월 18일 후잔에서는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은 후잔 상업고등학교 학생 모리 겐타(森 健太, 17세)가 숨졌고,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위는 한층 격해졌다.

그러나 시위는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불과 1년 전 1·23 사건을 거치며 숙군된 군은 정권에 충성했고, 하쿠센 조약 제4조에 따라 루이나군이 개입할 수 있다는 선례는 시위대에게도 부담이었다. 민주당 지도부는 거리 투쟁보다 선거무효 소송에 무게를 두었고, 노동자와 농민 조직은 시위에 폭넓게 합류하지 않았다. 정부는 6월 초 사이토를 내무장관에서 경질하며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했고, 5월 시위는 6월 중순을 고비로 잦아들었다.

5.2. 2년간의 산발 시위 [편집]

민주당이 제기한 선거무효 소송은 1968년 3월 대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대법원은 일부 선거구에서 부정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선거 결과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판결 이후 대학가에서는 다시 시위가 일어났고, 1968년 5월 13일 부정선거 1주기에는 신린과 후잔에서 수만 명이 거리로 나섰다. 시위는 대학 휴교와 학생 지도부 연행이 반복되는 가운데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1969년 3월 청평 접경의 히노타니에서 국경 충돌이 일어나자, 하세가와 정부는 이를 국가 비상사태로 규정하고 긴급조치 제1호를 발동했다. 집회와 시위가 허가제로 바뀌고 긴급조치 위반 사건이 군사법원 관할로 넘어가면서, 2년 가까이 이어진 시위는 사실상 봉쇄되었다.

6. 영향 [편집]

5.13 부정선거는 북산 권위주의 체제가 제도적으로 굳어지는 출발점이 되었다. 1970년 자유당을 중심으로 친정부 세력이 북산국민당으로 통합되었고, 같은 해 개헌으로 대통령 선거가 의회 간접선거로 바뀌었으며 임기는 6년으로 늘고 중임 제한은 사라졌다. 부통령제도 이때 폐지되었다. 정부는 부통령 선거가 국론을 분열시킨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야권은 5.13과 같은 사태를 다시 겪지 않으려는 여권의 계산이라고 비판했다. 하세가와는 1971년 간선으로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해 1977년까지 재임했다.

부정선거를 지휘한 책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경질된 사이토 다카아키는 1970년 북산국민당 창당을 주도해 초대 사무총장이 되었고, 1988년 사망할 때까지 한 번도 기소되지 않았다. 반면 부통령 임기를 마친 나카무라 마사아키는 민주당 대표로서 긴급조치 반대 운동을 이끌다 1973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이후 긴급조치 시대 야권의 상징이 되었다.

부정선거에 대한 공식적인 진상 조사는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4년 개헌으로 직선제가 복원된 뒤 야당과 시민단체가 진상 규명 특별법을 여러 차례 발의했으나 모두 하원에서 부결되었다.

7. 루이나 개입 의혹 [편집]

7.1. 드러난 정황 [편집]

루이나의 개입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1967년 민주당이 공개한 '사이토 보고서' 사본이다. 정부는 위조라고 주장했고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보고서에 언급된 대사관 접촉 일정 일부가 이후 공개된 외교 기록과 일치한다.

둘째는 루이나 내부 문서다. 1996년 루이나 시사주간지 《코망테르》는 1981년 루이나 정보기관 조사위원회의 비공개 부속서에 국가정보국의 '북산 선거 지원' 명목 예산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자금은 1966년 말부터 1967년 5월 사이 제3국 은행을 거쳐 자유당 계열 단체로 흘러갔다. 부속서 자체는 공개되지 않았으며, 2008년 루이나 시민단체가 낸 부속서 공개 청구는 국가안보를 이유로 거부되었다.

셋째는 북산의 출입국 기록이다. 2000년대 북산 연구자들은 1966년 말부터 1967년 상반기 사이 '행정 자문' 명목으로 입국한 루이나 국적자가 평소보다 크게 늘었다는 점을 확인했다. 다만 이들의 실제 활동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반면 루이나 고문이 선거 관리 기구와 경찰에 직접 자문했는지, 언론사 편집국에 심리전 기법이 도입되었는지, 하세가와가 루이나의 지원을 직접 승인했는지는 증언에만 의존하고 있어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7.2. 이권 양도 의혹 [편집]

선거 직후 북산과 루이나 사이에 체결된 일련의 협정은 개입의 대가였다는 의혹을 받는다. 1967년 9월 체결된 「동부 광업 개발 협정」으로 동부 산지의 광물 채굴권과 석탄·석유 탐사권이 루이나 기업들에 넘어갔고, 1968년에는 하쿠센 조약의 부속 약정 형식으로 루이나 해군의 항만 사용 범위가 호라쿠 등 동해안 항구로 확대되었다. 같은 해 공군기지 두 곳과 해안 포대 일부가 '공동 관리'로 전환되었으며, 철도와 전력망, 항만 건설 사업도 루이나 기업들이 사실상 독점하게 되었다.

야당과 비판적인 연구자들은 협정의 시기와 규모를 근거로 이것이 선거 지원의 대가였다고 본다. 사이토가 당내 회의에서 "정권이 살아남지 못하면 이권도, 주권도 의미가 없다. 정권을 지켜야 백성도, 나라의 체면도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는 증언도 이 주장의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 반면 정부와 여당은 모든 협정이 하쿠센 조약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통상적인 경제·안보 협력이었다고 주장한다. 선거 당시 정계와 사회에는 "루이나가 선거를 관리하고, 사이토가 나라를 팔아넘겼다"는 말이 돌았으나, 언론 통제 속에서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드물었다.

7.3. 루이나의 입장 [편집]

루이나 정부는 1996년 보도 이후 지금까지 북산 선거에 대한 개입 사실을 확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루이나 의회 정보위원회에서도 여러 차례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동맹국과의 외교 관계와 정보 활동의 기밀성을 이유로 공개 청문회는 열리지 않았다. 5.13 부정선거 지원 의혹은 오늘날 루이나의 대외 개입을 둘러싼 대표적인 논란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8. 평가 [편집]

5.13 부정선거는 북산에서 선거가 정권 교체의 수단이 아니라 정권 유지의 절차로 바뀐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부정 자체는 결과적으로 정권을 지켜 냈지만, 그 대가로 직선제와 부통령제가 사라졌고, 국민의 선택을 두려워한 정권은 긴급조치와 간선제로 스스로를 봉인했다. 오늘날 북산의 선거권위주의 체제는 1994년 직선제 복원 이후에도 이때 만들어진 관행, 곧 행정 조직을 통한 득표 관리와 야당 억압의 연장선에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루이나와의 관계에서도 이 선거는 의미가 크다. 하쿠센 조약이 군사적 종속의 틀을 만들었고 1·23 사건이 군 내부의 저항을 없앴다면, 5.13 부정선거는 선거라는 국내 정치의 핵심 절차까지 루이나의 영향 아래 놓였다는 의혹을 남겼다. 사실 여부와 별개로 이 의혹은 북산 야권과 시민사회에 깊은 불신을 심었고, '루이나 없이는 정권도 없다'는 인식이 여야 모두에게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9. 대중매체에서 [편집]

  • 《올빼미의 밤》(2003)
    • 형식: 극영화 / 북산 독립 제작
    • 내용: 1967년 로쿠도의 한 개표소에서 투표함 바꿔치기를 지시받은 젊은 군청 공무원의 하룻밤을 그린다.
    • 반응: 개봉 2주 만에 '사회 혼란 조장'을 이유로 상영이 중단되었다가 2010년 재개봉되었다.
  • 《투표함은 누가 옮겼나》(2016)
    • 형식: 다큐멘터리 / 루이나 방송공사(RBC)
    • 내용: 《코망테르》 보도 이후 20년 만에 사이토 보고서와 NIA 자금 의혹을 추적하며, 당시 북산에 입국했던 루이나 '행정 자문' 출신 인물의 인터뷰를 담았다.
    • 반응: 루이나에서는 동맹 외교의 어두운 면을 다룬 작품으로 호평받았으나, 북산에서는 방영되지 않았다.
[1] 기호 1번 후지타 히로유키 후보는 선거 한 달 전 사망.[2] 북산 이민자 출신.